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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함석헌과 조선일보 - 남궁협 교수(중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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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1-21 17:00

[제3호] 함석헌과 조선일보 - 남궁협 교수(중앙도서관 관장)

함석헌과 조선일보

남궁협 교수(중앙도서관 관장)

 

 요즘 한일 갈등 문제에 관한 보도를 보면, 처음 7월 한 달 동안 조선일보가 일본 정부를 비판한 기사의 수는 단 7건인 데 비해, 한국 정부를 나무란 기사는 무려 37건이나 된다. 자신의 태생의 비밀을 커밍아웃이라도 하듯.

 

 조선일보의 커밍아웃
 1919년 3월 1일 조선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평양고보 3학년 학생이던 함석헌은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서 동포들에게 나눠준다. 민중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화들짝 놀란 일제는 아예 조선민중의 저항의식 자체를 마비시키기 위해 문화통치를 단행한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이듬해인 1920년에 민족지인양 위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창간하게 한다. 그래야 조선민중들이 이들 신문의 주장을 믿고 따를 테니까. 조선일보가 1934년 4월 29일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1면에 게재한 사설의 일부다.

 

춘풍이 신록에 빛나는 이 청상한 계절에 제하여 만민일체로 천장의 가절을 봉축하는 것은 해마다 경하의 염을 새롭게 하고 감격의 정을 깊이 하는 바 있다.

 

 해방이 되자 조선일보는 잠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6.25가 터지자 금세 표변한다. 북의 기습남침으로 전세가 인민군 쪽으로 급속히 기운 것을 보고는 6.25 발발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조선일보는 재빨리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호외를 서울 시내에 뿌린다.
 6.25가 끝나고 이번엔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승만 친미정권에게 조선일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공에 앞장서는 투사로 거듭난다. 이어서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침탈하고 유신헌법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하자, 조선일보 등 모든 언론들은 박정희를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하며 권력의 애완견으로 전락한다.

 

<씨의 소리> 창간
함석헌만이 박정희 정권에 분연히 맞서 저항의 펜을 든다. 그는 이 땅에 “언론은 사망했다”라고 선언하고, 민중을 ‘씨’이라 부르며 씨의 편에서 정의와 진리를 좇는 참 언론 <씨의 소리>를 1970년에 창간한다.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 앞에서 아무도 권력비판을 엄두내지 못하던 시절이라 잡지에 싣는 모든 글은 함석헌 혼자서 다 집필한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 반세기 전, 함석헌이 청년의 기백으로 포효했던 창간사는 지금 우리 언론에 그대로 들려줘도 어색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달음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씨의 소리>는 유신독재로 모든 게 절망적이던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었다. 그리고 자유언론의 본보기였다. “고난은 자유인의 명예”라고 말했던 함석헌이 스스로 그 고난의 멍에를 짊어진 끝에 <씨의 소리>는 박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고 마침내 민주화의 봄을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일보 ‘프레임’과 가짜뉴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고, 내년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이다. 이렇게 100년을 이어온 역사적 두 사건을 대비해 놓고 보면, 함석헌과 조선일보만큼 우리 현대사의 모순을 압축하는 상징도 없다. 어색한 둘을 마주 보게 한 데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도덕적 훈계를 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조선일보와 같은 수구언론들이 한국의 여론시장을 좌지우지 하는 통에,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어서다.
 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캐나다의 미디어 비평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말했듯이, 언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조선일보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도,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는 중립을 가장한 조선일보라는 ‘프레임’에 오랫동안 갇혀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조선일보의 주장이 곧 나의 주장이 되고, 심지어는 나의 정체성이 되기까지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불편한 진실이다. 게다가 조선일보류 수구언론들은 유튜브나 SNS 등 새로운 숙주(기술)에 기생하여 변신과 번식을 거듭하고 있다. 요즘 ‘가짜뉴스’가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유인
 5년 전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나는 허겁지겁 팽목항에 달려갔다. 드넓은 항구의 주차장엔 이미 국내외 수많은 언론사 차량과 취재요원들로 빼곡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세월호 진실의 실오라기 하나 건져 올리지 못했다. 저널리스트의 사명을 외면한 그들은 ‘기레기’였다. 최근 ‘조국 사태’에서도 기레기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들은 세월호 때보다도 5배나 많은 100만 건이 넘는 쓰레기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내어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광기의 도가니에 빠져 저주의 돌팔매질을 해댔던가.
 언제까지 그들의 노예로 살 것인가? 함석헌은 <씨의 소리> 창간호에서 “사상의 유격전”을 촉구한다. 주체적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거짓으로 일관해온 조선일보류 수구언론들과 결별하고, 대신에 <씨의 소리>를 본받고자 하는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언론들을 찾아서 세상을 균형 있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실을 분간할 수 없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 자유인이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외쳤듯이.

 

참고도서: 함석헌, 『씨의 소리』, 1970~1980(총 95호)
          현재는 절판중이며,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다시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