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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호] 지금은 기억전쟁 중 - 김경주(공연전시기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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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1-21 17:52

[제6호] 지금은 기억전쟁 중 - 김경주(공연전시기획학과 교수)

지금은 기억전쟁 중

김경주(공연전시기획학과 교수)   


 한 사회는 문화적 기억의 공동체                     
 독일의 이집트 연구가이자 종교학자인 얀 아스만은 기억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모방적 기억’으로 도구의 사용법 등 인간의 일상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학습기억이며, 둘째는‘사물의 기억’으로 거주하는 공간과 가구, 집, 도로 등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시간적 차원을 갖는 기억이다. 셋째는 ‘소통의 기억’으로 한 시대가 자기 시대의 과거에 대해 보유하고 있는 당대적 기억이다. 여기까지의 기억들은 신체적이고 공간적이며 다분히 개인적인 기억에 가깝다. 그런데, 마지막 ‘문화적 기억’은 앞의 세 가지 기억들이 ‘의미’를 통해 전환될 때 발생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기억이다. 공동체 사회 안에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이 다양한 상징적 제의(祭儀)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할 때 문화적 기억은 형성된다.
 아스만에게 영향을 주었던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브바슈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적 기억’은 기억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사후에 재구성되며 그 기억은 집단적인 것으로 사회가 기억을 ‘제작’한다는 것이다. 또 그 기억이 만들어지고 전승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장치가 필요한데 언어, 상징, 텍스트, 그림, 의례, 기념비 그리고 특정 장소 등이 동원된다.
 기억이 그렇듯 ‘고안된 것’이라면 기억은 의지적이며 거기에 내포된 의도는 다분히 ‘서사적 구조’를 지닌다. 또 기억이 특정집단의 의도 아래 성립된다면 기억은 분명히 선택적이며 그 선택된 기억은 ‘여타의 것에 대한 망각’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특정집단에 의해 선택과 배제로 재구성된 기억은 권력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기억은 변화하지만 사회적 기억은 변화에 한계가 있고 사회구성이 전면적으로 변경될 때에만 완전히 바뀔 수 있다.
 결국 사회적 기억이란 문화공동체가 지니는 ‘집단 정체성’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유통되는 공동 의미 속에는 항상 ‘지혜’와 ‘신화’가 존재한다. 지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규범적 격언’이라면, 신화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문화적으로 승인하는 ‘형식적 서사’다. 따라서 ‘규범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는 그 유통방식이 다르다. 규범적 의미는 일상의 소통 속에서, 문화적 의미는 기념비적 행위 속에서 각각 유통된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의미는 어떤 의도로든 ‘연출’되는 것이며 그 의미의 소통은 제도화 된다. 즉, 사회의 정체성은 문화적 의미에 의해 형성되며 문화를 전승해주는 기억이란 집단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사회적 기억에 다름 아니다.
 ‘소통의 기억’, 즉 ‘당대의 기억’이 문화적 기억과 다른 점은 시간성에 있다. 문화적 기억은 사후에 성립된 전언(傳言)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과거가 어떻게 전승되느냐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도사린다. 가령 1980년 5월 광주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지울 수 없는 당대적 기억이지만 그 이후로 태어난 세대에게는 마치 6.10 만세운동이나 3.1 운동과 동렬로 압착되어 기억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가까운 과거가 먼 과거의 기억을 제치고 늘 현재로 끼어들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기억투쟁으로서의 역사
 벌써 12년 전 쯤의 일로 기억되지만 소설 하나가 여론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그것은 『요코 이야기』라는 책으로 일본인 여성작가 요코 가와시마 와킨슨이 쓴 체험소설이었다. 내용은 1945년 당시 11살이던 일본인 소녀가 한반도를 종단한 끝에 부산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 귀향길에서 그녀 일행은 한국인들에게 쫒기고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책이 ‘대나무 숲 저 멀리’ 라는 제목으로 미국 중학교 영문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하여 재미교포, 한국계 미국인들이 ‘좋은 일본인’ ‘나쁜 한국인’의 시선에 갇혀 지탄받고 있다는 내용이 연합통신 특파원에 의해 보도 되었다. 한국 언론은 요코가 자신을 ‘일본판 안네 프랑크’로 만들었다고 비난했고 그 책을 출판한 <문학 동네>는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이 내용은 일본의 민족적 기억, 즉 원폭 피해자라는 그들의 문화적 기억과는 일치했지만 이는 한국의 민족적 기억, 즉 피지배와 억압, 수탈과 항일이라는 문화적 기억과는 첨예하게 충돌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충격 받은 국내의 한 여성 소설가는 『나비 날다』라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 관련 소설을 영문판으로 출간하여 대응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무관심으로 한국어 출간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내게 토로한 적이 있다.
 또 일방적인 수출품 규제로 반일감정이 증폭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시민사회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 느닷없이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들이 일제 강점기의 지난 역사를 새롭게 현재로 틈입시키려는 내용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제국 쇼와 천황 시기 한국 식민지배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고종의 무능함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에 의해 피폐해진 조선을 일본이 합병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주장되었다. 1950~60년대에 사라졌지만 일부 우익 정치인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주장되어오던 것이 최근 뉴 라이트 계열의 안병직 이영훈 등에 의해 재주장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학문적 판별은 우선 당시의 정확한 기록과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경제사학자들의 몫이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최근 모 대학의 교수가 자신의 강의에서 일제강점기 위안부문제를 ‘매춘’으로 표현해 일으킨 논란과  ‘토착왜구’ 등 정치권을 향한 분노에 찬 발언들을 보면서 거의 확증편향으로 치닫는 그 깊은 내면의 문화적 기억들이 어쩌면 이리도 서로 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사학자 앙리 루소의 말을 빌면 ‘기억의 벡터’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교육’이다. 공적 기억은 교육을 통해 전달되며 여기에 미디어, 문학, 의례 등의 다른 벡터들이 가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그 것도 국내유수의 대학교수가 내뱉는 “자발적 매춘” 따위의 얘기를 다시 듣지 않기 위해서, 또  미래세대로 전승될 역사의식을 위해서 ‘기억전쟁’이야말로 치열하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참고도서 : 태지호(2014), 『기억문화 연구』, 커뮤니케이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