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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연] ‘반일 종족주의’, 그리고 역사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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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2-23 10:02

[유재연] ‘반일 종족주의’, 그리고 역사의 진보

‘반일 종족주의’, 그리고 역사의 진보
유재연 (관광일본어학전공 교수)
 

  토착왜구의 노골적 친일 행각
  지난 달 21일 일본 도쿄의 기자클럽에서 『반일 종족주의』의 편저자 이영훈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일본어판의 출간과 예사롭지 않은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반일 종족주의』의 일본어판은 출간 전부터 매스컴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11월 초 서점에 깔리기 시작한 지 3주 만에 25만 부가 팔리면서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이영훈은 그러한 일본의 반응에 한껏 고무된 모습이었다. 기자회견은 책의 저술과 관련된 전반적인 설명에 이어 50분 정도 기자들과 질의응답으로 이어졌다. 이영훈은 서두에서 이 책에 대해 “한국 현대 문명에 침잠하고 있는 ‘원시’와 ‘야만’을 비판했다”면서 ‘한국인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의 소산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공 문제를 언급하면서 80년대 후반 이후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성을 부인하면서 온갖 방해를 해왔는데,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야만과 원시를 바로잡기 위해 연구성과를 모아 책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책을 구입하는 연령대가 주로 3~40대로, 기성세대보다 훨씬 강도 높은 반일 교육을 받았을 이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더디지만 역사는 진보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진 기자들의 질의응답 차례에서 주목할 만한 질문이 하나 있었다. 질문자는 아사히신문 소속으로 자신은 한국어판이 출판되었을 때 구입하여 읽어보았는데, 내용상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두 가지 구체적인 사실을 파고들었다. 하나는 징용의 법적 근거 문제로 1944년 9월 이전의 징용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언제든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하더라도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당시의 실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이미 도쿄대의 도노무라 교수를 비롯한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려면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징용공들에 대한 대우가 노예가 아니었으며, 자유롭게 생활하고 화투를 즐기고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극히 일부 사람들의 예일 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도 전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영훈은 답변에서 징용공을 상대로 한 인터뷰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이승만학당’의 홈피에 올라온 글을 종합해볼 때 충분히 근거가 있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또 도노무라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는 일본인으로서 양심적인 연구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종족주의적 문화와 결합시켜 한국민을 역사 잃은 노예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는 애매한 답변으로 횡설수설했다.
  나는 무려 80분에 이르는 그의 기자회견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면서 수차례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나마 그 아사히신문 기자의 질문이 인내심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사회자는 도중 일부러 한국 기자에게도 질문 기회를 주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나중에 중앙일보 기자의 그만그만한 질문이 하나 나왔을 뿐이었다. 새삼 받아쓰기에 길들여진 한국 언론인의 무개념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친일파의 질긴 뿌리
 경직된 한일관계를 숙주로 삼아 등장한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행태가 갈수록 가관이다. 엊그제 뉴스에는 종군위안부 수요집회 현장에까지 나타나 방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잡음에 대한 거부감과 종족주의라는 생소한 용어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행태가 낯설지만은 않다. 뉴라이트와 겹치는 그들의 실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왔고 학계,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서 나름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멤버의 일부가 가담하여 2007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①・② 두 권을 연구성과로 내놓으면서 학계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기억이 또렷한 탓도 있다.

  80년대 대학이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당시의 출판문화운동의 세례를 받고 해방공간을 전후한 한국 사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매우 정겨운 책 이름일 터이다. ‘재인식’에서 ‘재’만 제거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한국사회에 끼친 해악 즉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편협하고 균형감각을 잃은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재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책을 내놓았고 했다.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무게만큼 제법 값이 나가는 두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재정적으로 그들의 활동에 일조를 한 셈이다. 그렇지만 내 서재에 이미 그 책은 없다.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정리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잠시 신세를 졌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 장정일의 책 분류 기준으로 보면 ‘산 책’, ‘버린 책’, ‘빌린 책’의 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책이 되어버렸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편저자인 박지향은 머리말에서 “역사가라면 역사가 얼마나 천천히 진행하는지, 역사의 강은 때로는 곧장 흐르지만 때로는 굽이굽이 휘돌기도 하고,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주로 강도 높은 반일 교육을 받은 3~40대가 『반일 종족주의』를 구입한다며, 역사의 더딘 진보를 들먹이는 이영훈의 말과 자연스럽게 겹치는 발언이다(사실관계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 매스컴에서는 구매자를 60대 이상의 노년층이라고 보도했다). 기막힌 역설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부르짖는 무리들의 등장을 보며 역사의 굴곡과 느린 진보를 새삼 떠올린 것은 나뿐만이 아닐 텐데 말이다.
  『반일 종족주의』 소동을 보면서 문득 『영속패전론』의 역자 후기에서 정선태 교수가 언급한 ‘영속식민지론’이 떠올랐다. 그는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가 종주국만 바뀌었을 뿐 식민지의 연속이라고 전제한 후 식민지의 경험을 미화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하려 하는 세력이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해왔다고 지적하고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귀결점이 바로 영속식민지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한국 현대사를 성찰하는 입장에서 수차례 언급되어 왔듯이 우리 스스로가 식민지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을 이루어내지 못한 탓일 터이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정종현이 내놓은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개인의 연구성과라는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주목할 만한 작업으로,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등장과 그 계보의 기원을 살피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라는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식민지 시기는 물론 해방 후의 한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고 그 영향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즘과 학문의 자유라는 레토릭으로 치장한 반일 종족주의자론자들 목소리의 향방은 쉽사리 예단하기 힘들겠지만, 그 뿌리의 깊이만큼 질긴 생명력으로 보아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그들에 대한 비판이 무시나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그 기원이나 현상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사의 진보라는 명제를 깨달아 가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까 한다. 

 

사족. 나는 이글을 쓰면서 『반일 종족주의』의 편저자 이름에 일부러 그의 전 직장과 직업을 밝히지 않았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그의 전 직장과 직업은 책 내용의 진위와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권위와 신뢰를 안겨주었고, 심지어 일본의 아베는 국회에서 강제징용공과 위안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데 이영훈의 책을 그 근거로 제시했고, 어김없이 그의 전 직장과 직업이 수식어로 제시되었다. 전 직장과 직업이 지닌 아우라의 숭배에 대한 내 개인적인 저항이기도 하다.


-참고도서: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