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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진] 좋은 사람(Good man)과 좋은 시민(Good citi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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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1-25 14:05

[임수진] 좋은 사람(Good man)과 좋은 시민(Good citizen)

좋은 사람(Good man)과 좋은 시민(Good citizen)
 
동명의 소설과 영화로 알려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에서 한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전범으로 재판을 받는다. 평범하게 책임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믿는 그는 다른 피고인들이 자신의 혐의를 부정한 것과 달리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멘스사를 그만두고 왜 친위대에 자원했는지, 어떻게 가스실에 사람들을 보내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러니까 제 말은...계속 사람들이 수용소에 들어와 모두 같이 지낼 공간이 정말 부족했어요. 그래서...” 그리고 이어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내가 감시원으로 지원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우리도 악마가 될 수 있다
한나에게는 자신의 삶, 그리고 행위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이 필요치 않았다.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책임이었고, 양심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근무했던 강제수용소에서 한 행위에 대해 어떤 갈등이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겐 나쁜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듯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불행은 특별한 악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 혹은 조직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을 떠받치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무사유(thoughtless)’,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했다. 사유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돌아보는 행위를 하는 자기와 돌아보는 내가 바라보는 자기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을 느끼며, 자신이 한 행위의 의미를 깨닫고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이 불편한 진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 ‘좋은(善) 사람들’이 좋은 시민이 아닐 수 있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밖에 있는 다른 존재를 인식하며 온전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 주변에 심각한 파장(惡)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렌트가 작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시민불복종,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의 사이
두 번째는 우리의 행위와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사유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했던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에 대한 문제를 <공화국의 위기>에서 되짚으며,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은 같지 않고’, 좋은 시민은 좋은 국가에서만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개인의 도덕수준에서 요구되는 문제보다 국가와 법체계의 내적 불안정성과 취약성(법집행기관의 잘못된 법집행과 같은)이 시민의 불복종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좋은 국가를 위해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 논의에서 시민의 불복종은 다수의 시민이 변화를 이루어 낼 정상적 통로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제대로 청취 혹은 처리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 다른 경우로는 정부가 그 적법성과 합헌성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꾀하거나 정책을 추진한다는 확신이 들 때 일어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불과 3년 전에 국정을 농단한 무능한 정권에 맞서 촛불을 드는 방식으로 시민불복종을 시도했고, 지금 다시 검찰개혁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민의 도덕적 결단과 정치적 결정 사이의 긴장이 고조에 달했던 그 때(2017년 2월) 기무사가 작성한 <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이라는 문서에는 ‘점령’, ‘진압’이라는 단어로 명시화된 계엄령 추진 계획이 있었다. 여전히 지금 어떤 집단에서는 여론을 조작하는 등으로 시민의 불복종을 경계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시민의 불복종은 ‘좋은 시민’으로서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주관성, 즉 한 개인의 양심이 다른 개인의 양심과 대립하는 결과를 뛰어넘어, 각 개인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시민이 되어가는 여정 중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역사는 보여준다.


좋은 시민은 배움으로 길러진다
“좋은 사람은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내게는 대학 1학년 첫 학기에 수강했던 ‘민주정치론’의 기말고사 시험문제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그 기회를 통해 좋은 시민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려 돌아가 건져 올린 사실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좋은 시민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얻은 것과 같은 배움의 기회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좋은 시민으로서의 삶을 배우고 나눌 수 있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 사이의 전이를 시도하는 노력을 지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시민이며, 곧 좋은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사회구조와 이를 지지하는 공동체의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 참고도서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 참고도서 2: 한나 아렌트, 『공화국의 위기』, 한길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