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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역사란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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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1-25 14:09

[김춘식] 역사란 성찰이다

역사란 성찰이다

 김춘식 (에너지시스템경영공학전공 교수)

 

 역사는 반복되는가?

 한 여름에 일본의 기습적인 경제도발로 냉랭해진 한일관계는 겨울의 문턱에서 여전히 꽁꽁 얼어 있다. 혹자는 이러한 일본의 공세를 100여 년 전의 역사와 유사한 상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자국의 미국에 대한 식민지적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그렇듯, 정치경제적인 갈등은 양국의 상호 이해관계가 형성되면 곧 해빙의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문제는 그 모든 갈등의 핵심에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없을 경우 유사한 갈등상황은 언제든 반복될 것이다. 양국 간의 갈등에 대한 원인은 그 해법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그 갈등과 반목의 원인에는 분명하게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점령과 한국인에 대한 착취와 지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 사과,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가해자인 ‘일본(인) 자신의 역사와 미래세대’를 위해서 더욱 더 필수불가결한 일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희생자 앞에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우리는 진정성이 있는 사과로 불행했던 과거로부터의 출구를 찾아낸 사례를 독일과 독일 국민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주변국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60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야만과 폭력을 자행한 나치 독일과 이에 동조한 독일의 대중공범자들! 그러나 독일은 한 리더의 진정한 용기로 참혹하고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화해와 평화의 미래로 치환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리더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제4대 총리를 역임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다.


 브란트는 서독총리로서는 최초로 1970년 12월 7일 국교정상화의 초석이 될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독일은 제1차/2차 대전의 전범국가라는 이유로 유럽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 중 하나인 폴란드에겐 말할 것도 없었다. 브란트 총리의 폴란드 방문에 대한 전 유럽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국민들의 시선은 차가운 것을 넘어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전 세계를 충격과 감동에 빠뜨리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브란트 총리가 2차 대전 중 바르샤바 게토에서 나치에 저항하다가 참살당한 5만 6천여 명의 유대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헌화를 한 후, 갑자기 비가 내리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사전에 전혀 계획이 없었던 돌발 상황에 수행보좌관들은 물론 사진기자들까지 당혹감에 눈을 의심했다. 당시 브란트 총리의 폴란드 방문을 TV생중계로 지켜보던 유럽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특히 이 장면을 지켜본 폴란드 국민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당일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총리는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라며 통곡했다.

 

 “무릎을 꿇은 건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이 사건에 대해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무릎 꿇을 필요가 없었던 그가 정작 무릎을 꿇어야 할 용기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무릎을 꿇은 것”이라며 이 사건의 상징성을 해석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브란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망명해 반나치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당시 어느 한 언론은 “무릎을 꿇은 건 한 사람이었지만,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훗날 그는 그날의 돌발행동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명하는 장소에서, [...]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단지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브란트의 진심어린 사과와 참회는 폴란드와 유럽은 물론 전 세계가 독일을 다시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과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더라면 유럽의 인심이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그 이후 독일은 불행했던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물론, 지속적으로 배상과 보상도 진행하였기에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신뢰회복을 토대로 독일은 1990년 재통일의 기회를 얻었고, 나아가 유럽 통합의 주역이자 현재 유럽 사회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 지 1년 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브란트는 나치 독일을 반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럽 전체의 평화와 화해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그는 우리나라의 햇볕정책의 모델이 된 소위 '신동방정책'으로 동독과 동유럽 및 소련과의 동서화해 정책을 펼쳤다.

 

 불행했던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2015년 5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다하우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우리는 희생자들과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전에는 “역사에 종지부는 없으며, 과거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다짐했다. 독일의 불행했던 과거는 세대와 세대를 넘어 피해자에 대한 ‘무기한’의 역사적 책임이며, 그 책임은 ‘독일인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흔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 과거사를 용기로 대면하는 국민이자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결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현재를 안고 미래의 시간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불행했던 과거는 국가 간의 협상으로 폐기될 수 없다. 단지 반성과 성찰이 있을 뿐.


 브란트의 사죄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기념비와 함께 브란트 광장이 마련되었다. 오늘을 사는 한국과 일본의 국민들이 브란트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성으로 과거를 대면한 브란트의 용기가 기어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가깝고도 먼 숙명의 이웃나라 일본에는 왜 브란트가 없는가?


1. Egon Bahr, 박경서 역,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 에곤 바의 생애 마지막 회고!????, 북로그컴퍼니, 2014.
2. Gregor Schöllgen, 김현성 역, ????빌리 브란트????, 빗살무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