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칼럼 Dongshin University
칼럼독서칼럼

독서칼럼


[남궁협] 언제까지 현실타령만 할 것인가

조회 111

관리자 2019-11-25 14:25

[남궁협] 언제까지 현실타령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현실타령만 할 것인가

남궁협(소방행정학과 교수)

 

 교육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마침 숙연해지는 계절이기도 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얘기를 좀 할까 한다. 최근 신문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는 교수를 사치스럽게 여기는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어느 전직 교수의 고백을 읽고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고백은 9년 전 “진리도 정의도 우정도 없는 대학을 그만 둔다”라며 홀연히 대학을 떠났던 당시 고려대 3학년생이던 김예슬 씨의 대학거부 선언과 데자뷰를 이룬다. 이들이 안정적인 기득권을 내려놓은 데는 그만큼 대학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고뇌가 더 컸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턴가 학기가 지날 때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해마다 행정적인 절차와 평가가 촘촘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학이 행정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누리사업’을 시작으로 교육부의 각종 대학지원 사업이 시행되면서부터다. 교육부는 지방대학의 재정적 어려움을 교묘히 이용하여 채찍과 당근을 구사했다. 교육부의 포로가 된 지방대학들은 어느덧 교육부의 지원 사업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대학운영을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대가는 참담하다. 각 사업마다 다른 요구조건에 맞추다보니 대학이 난개발 되고, 온갖 행정절차와 문서행위가 넘쳐나며, 그리고 교수와 학생들은 각종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겨우 움직이는 파블로프적 반응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형식이 대학을 짓누르는 사이에 교육은 질식되어 갔다.

 

 교수와 학생들이 행정에 동원되는 현실에선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 해도 시큰둥할 수밖에는 없다. 교육에 자율성과 자발성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취지로 시작했을 테지만 제도와 형식이 내용을 집어 삼켜버린 꼴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대학에서 나름 파격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내놔도 정작 교수나 학생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보니 대학엔 만성 피로증에 냉소와 무관심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대학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갇히는 형국에 놓여 있다. 지금 대학위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대학의 현실을 보면서 ‘합리성’이라는 형식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통찰했던 독일의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떠올린다. 베버는『경제와 사회』에서 현대사회가 합리적 이성의 힘으로 비합리적 주술에서 벗어났지만, 형식 합리성이 사회 전반을 과도하게 지배하면서 도리어 ‘비합리성’이라는 역설을 빚고 말았다고 말한다. 베버는 과학을 앞세운 합리적 이성이 현대문명을 가져온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 세상의 절대적 기준이 될 때 예상치 못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과학이 신을 대신하면서 지구 멸망의 묵시록을 재촉하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패스트푸드점처럼 운영되고 있는 대학
 문제는 합리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합리성을 매우 바람직한 인식 태도로 간주하고 장려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리성을 가리키는 영어 낱말 ‘rationality’가 ‘계산하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ratio’에서 유래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말은 손익을 따져봐서 철저히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합리성은 주어진 조건이나 룰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오직 그것에 잘 순응하여 유리한 성과를 내는 것만을 중요시 한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현실에서 성공을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돈과 권력을 추종하게 만든다. 오늘날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사회정의조차도 모두 힘(돈과 권력)으로 결정되는 세태는 합리성의 과잉이 초래한 결과다.


막스 베버가 100년 전에 현대사회의 모습을 우울하게 전망했다면, 베버의 관점으로 지금 세상을 고발한 책이 조지 리처가 쓴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리처는 이 책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21세기 현대사회는 맥도날드 가게처럼 철저히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손님이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유니폼을 입은 점원의 영혼 없는 인사말이 들려오고, 주문받는 매너와 음식 서비스 등 모든 것이 표준화된 매뉴얼에 따라 진행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산 끝에 나온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처럼 고도로 합리화된 시스템은 평균 근무기간이 채 3개월도 안 될 정도로 점원들을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시달리게 하고, 식재료는 질보다는 저렴한 걸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한다. 이렇게 이윤만을 노리는 패스트푸드점들이 프랜차이즈를 형성하여 동네상권을 장악하게 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맥도날드 가게만 그런 게 아니라 사회 곳곳이 모두 맥도날드 가게처럼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특히 대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리처의 지적이 눈길을 끈다. 예컨대, 대학이 주요 교육정책을 경영의 시각에서 결정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게 되어 대학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교육의 수월성을 명분으로 다양한 수업방식을 도입하지만 오히려 교육내용보다는 형식에 더 얽매이게 하며, 성적 평가의 공정성을 내세워 객관식(혹은 단답형) 문제 출제를 늘리고 있는 것도 생각하는 교육을 말살하게 된다. 이렇게 대학이 합리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결과는 비교육적이고 심지어는 반교육적이기까지 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학 구성원들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예 문제의식조차 없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이어야
 이렇게 말하면 대번에 “그렇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는 볼멘 반응이 돌아온다. 교육부가 더 문제이지, 개별 대학이나 교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노릇 아닌 가 등등의 이유를 댄다. 막스 베버는 현대사회의 ‘합리성’ 이데올로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집단적 체념에 빠뜨리기 때문에 더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현실 체제에 내면까지 포섭되어 ‘쇠감옥(iron cage)’에 갇힌 것처럼 그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적 조건에 순응하는 것만을 합리적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에 있는 대학의 한 보직교수가 <한국대학신문>에 기고한 글(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212887)이 폐부를 찌른다. 대학이 위기라며 맨날 보직자들이 머리를 맞대지만 아이디어랍시고 내놓는 것들은 즉흥적인 꼼수들뿐이라는 얘기다. 새로운 상상력과 전략적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에 사고가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사회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놀라운 변화의 추동은 무모하게 보이는 도전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좋은 뜻이 굳은 의지로 표현되면, 사람들은 그 뜻을 보고 모여들게 마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물적 조건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이 먼저가 아니라 좋은 뜻이 먼저다. 그런데 좋은 뜻은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에서 발현된다. 지금 우리에겐 함께 이어갔으면 하는 숭고한 뜻이 있기나 한가? 우리는 허둥대고만 있지 세월호처럼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중한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한 해가 저무는 세밑에 깊이 돌아보게 된다.

 

참고도서
-Max Weber(1921), Wirthschaft und Gesellschaft, 박성환(역,2009), 『경제와 사회: 공동체들』, 나남.
-George Ritzer(1993),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 김종덕 외(역,2017),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풀빛.
                   
신용복 그림, <대학>

신용복 그림,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