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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고장난 자본주의와 지역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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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2-16 17:13

[김경주] 고장난 자본주의와 지역 공동체

고장난 자본주의와 지역 공동체

김경주 (공연전시기획학과 교수)

 

  자본주의에 던지는 잇따른 경고음
  최근 자본주의가 고장 났다는 경고가 심상치 않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미지크는 그의 저서 『고장난 자본주의』에서 유럽연합, 그리스, 스페인의 사례를 들어  전 지구적 자본시장이 겪는 불안정성과 금융위기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란 누구에게나 자본의 생산과 소유, 혹은 축적의 자유를 허락하는 경제 시스템이지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재화의 생산과 소비과정의 ‘효율’에 집중한다면 사회주의는 그것의 ‘형평’에 가치를 둔다. 미지크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 자본의 생산과 소유 그리고 그 축적이 무한대로 허용될 때 걸리는 과부하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도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기능은 오로지 소수의 금융 자본가들을 위해 최적화 되었다는 것이다.
  미지크의 책 원제인 ‘카푸탈리스무스(Kaputtalismus)’는 ‘고장난’이라는 뜻의 독일어 'Kaputt'와 자본주의 ‘Kapitalismus'의 합성어로 저널리스트다운 의미함축을 하고 있다.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대안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상식이 지배하는 ‘함께하는 경제체제’이다. 이것은 작은 그룹들을 단위로 하는 DIY 형태의 경제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코뮤니즘(Communism)이 아니라 코모니즘(Commonism)이라고 주장한다. 그 코모니즘은 번역자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유주의’가 아닌 ‘상식주의’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미지크는 뇌사상태에 빠진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분배의 문제’ 차원이 아닌 ‘전체적인 사회 시스템의 새로운 구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이와 유사한 진단은 몇몇 경제학자들에게서도 드러난다. 라구람 고빈드 라잔 시카고 대 교수와 폴 콜리어 옥스퍼드 대 교수, 그리고 앵거스 스튜어트 디턴 프린스턴 대 교수가 그들이다. 인도 출신 라구람 라잔 시카고 대 교수는 “현대자본주의 문제를 국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로 규정할 수 없지만 명백히 공동체의 실패”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포용적 지역주의’를 제안한다. 이 또한 지역단위와 공동체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미지크의 대안과 일맥상통한다.
  또 폴 콜리어 옥스퍼드 대 교수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의 원인을 ‘능력주의’와 ‘기술혁신에 대한 맹신’에서 찾는다. 그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능력주의로 인한 대도시로의 자원집중과 세대 간의 대물림, 주주만을 위한 기업정책들이 불만을 누적시켜 왔으며 가장 좋은 자원들은 대도시, 대기업, 그리고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자녀들에게 대부분 분배되고 여기에서 소외된 지역 공동체엔 분노만 쌓여왔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에 대한 맹신의 문제 또한 소외를 부추긴다. 가령 국내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들에게 ‘스카이패스’라는 기술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지역사회와 공동체의 회복이다. 하지만 문제해결이 쉽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지목한 기술혁신, 선택과 집중, 도시화,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고등교육 등이 모두 현재 자본주의의 핵심요소로서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 대 교수는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한 시스템을 망가뜨려 놓고 그 시스템의 미덕을 찬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라구람 라잔의 공동체 회복을 위한 ‘포용적 지역주의’에 공감하면서도 “능력주의라는 램프의 요정을 한번 꺼낸 이상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며 “지역 공동체와 로컬리즘 정책이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어려울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자본주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목소리를 키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소 뜬금없지만 여기에서 스웨덴 여성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잘 알려진 책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1970년대 중반 헬레나가 히말라야 오지의 ‘라다크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한 청년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을 보여 달라”고, 그러자 그 청년의 대답은 “이 곳에는 그런 집이 없어요.”였다. 검소한 생활방식과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라다크 공동체’에는 가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 십년 후 쯤 헬레나가 라다크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청년이 서양인 관광객을 향해 한 말은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 라는 구걸의 말이었다.
  평화롭던 라다크 공동체에서는 십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자기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혐오를 내면화하며 ‘라다크적인 것’을 전부 부정하는 마음을 형성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이름이 불러온 ‘욕망의 불씨’였다. 이미 한껏 웃자라버린 자본에 대한 욕망이 내면화 되어 있을 때 누가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괴물이다
 최근 영국의 레가툼 연구소에서는 공동체 구성의 필수요소인 사회자본 중 개인과 개인 간의 신뢰, 제도에 대한 신뢰가 진정한 번영을 위한 핵심적인 두 요소라고 지적하고 개인적 관계, 사회적 관계, 제도에 대한 신뢰, 사회 규범, 시민의 참여 등을 측정한 결과 167개 국가 중 심각하게도 한국은 바닥권인 142위라고 발표했다. 이는 사회적 경제니, 포용적 성장이니 하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당면한 불균형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와 포용에 매우 인색한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인 이들의 거대담론에 답할 재간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끊임없이 자본의 소비시장으로 내몰렸던 지역사회에 실종되어버린 사회적 자본을 스스로 복구하고 공동체 회복을 통해 치유의 방안을 마련하라는 말들은 솔직히 소박하다 못해 옹색해 보이기까지 하다.
  에둘러 말할 것 없다. 우리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이고 보면 그 최종 책임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괴물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탐욕의 괴물이 되었다. 따라서 공동체의 기반인 ‘공감 능력’의 상실, 즉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내면의 ‘욕망의 기제’를 먼저 걷어내야 한다.

 

-참고도서:
Robert Misik(2016), Kaputtalismus, 서경홍(역,2017), 『고장난 자본주의』, 청년사.